존엄과 안전(엄기호, 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백남기 농민이 운명하셨다. 경찰이 쏜 물대포에 맞아 죽음과 맞서신지 316일 만에 끝내 숨을 거두셨다. 우리는 백남기 농민의 죽음과 함께 다시 한 번 한국사회에서 삶이 어떤 처지에 놓이게 되었는지를 깨닫게 된다. 죽음이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우리가 전혀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메르스는 질병 앞에서 국가의 방역망이 어떻게 뚫릴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 질병으로부터의 안전. 이것은 근대국가가 위생과 보건을 도입하면서 가장 먼저 극복하고자 노력했던 위협이다. 그 ‘오래된’ 위협이 다시 귀환했지만 국가는 철저히 무능했다.
강남역. 강남역 사건과 그 이후에 터져 나온 여성들의 목소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여성들의 안전은 짓밟히고 있었다는 걸 증언했다. 이 사건이 우연하고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라 여성들이 보편적으로 경험하고 느끼고 있는 위협이라는 걸 말이다. 가정에서부터 길거리, 학교나 직장, 그 어디에서도 여성을 향한 폭력이 존재한다. 안전한 곳은 없다.
구의역 사건. 구의역 사건은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먹고 살기 위한 노력’이 어떻게 죽음에 닿아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근대 국가가 보장해야하는 안전의 또 다른 영역이 바로 경제다. 시장의 변덕으로부터 항시적으로 해고의 위협, 해고로 인한 생계의 위협에 시달리는 삶을 보호하는 게 국가의 역할이다. 또한 현장에서의 사고를 예방하고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게 국가다. 그러나 이런 안전은 없다는 걸 구의역 사건은 우리에게 여실히 알려줬다.
경주의 지진. 물론 자연재해는 근대국가가 완전히 제거하거나 극복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재해로부터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여러 가지 예방조치들을 한다. 또한 재해가 발생했을 때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즉각적으로 대처한다. 그러나 경주의 지진은 이 나라가 자연재해에 대해 얼마나 무지하고, 무능력하며, 나아가 무모한지를 보여줬다. 무지가 바로 무모함을 낳으며 그 무모함이 국민의 생명을 위협한다.
이처럼 우리는 지난 4년간의 여러 가지 사건들을 통해 국가가 국민들의 삶을 보호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국가는 생명을 지키는데, 무관심하고, 무지하고, 무능하고, 무모했다. 그리고 백남기 농민의 죽음은 이에 더하여 국가가 국민의 생명을 앗아가는 죽음의 폭력을 휘두르는 데는 매우 유능하다는 것을 확인하게 했다. 이 죽음의 권력 앞에서 우리는 이 나라에 없는 것이 무엇인지를 여실히 깨닫게 되었다. 안전과 더불어 존엄이다.
인간의 존엄은 어디에 있는가? 인간의 존엄은 생명 하나하나가 대체되지 않는 절대적인 고유성을 갖고 있다는 데에 있다. 그렇기에 한 생명이 지는 것은 곧 한 우주가 사라지는 일이다. 인간 존엄의 근거는 그가 누구든, 그가 어떻게 살았건 상관없이 그의 절대적 고유성을 무조건적으로 ‘가정’하는 데에 있다. 그렇기에 인간의 존엄은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 ‘가정’을 절대적으로 지키는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노력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이며 ‘존재’하기 된다.
그러므로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서는 고도의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이런 노력이 존재하지 않는 순간 인간은 존엄한 존재이기는커녕 가장 모독 받는 존재가 된다. 서구가 나치의 경험 이후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인권과 인도주의와 관련된 법적/제도적 장치를 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의 존엄성은 자연발생적인 것이 아니라 의도적 노력에 의해서 ‘가까스로’ 지켜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하는 것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이 존엄에 대한 보호가 그저 생명의 존엄을 넘어 ‘인간’의 존엄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인간을 강조하는 것은 생물학적 위계에서 인간보다 아래에 있다고 간주되는 동물이 아닌 존재로서의 인간을 의미하는 바가 아니다. 오히려 이 인간은 한자가 말하는바 그대로 ‘사이에 존재하는, 사이로서 삶’이라는 의미에서의 존엄이다. 이것은 그리스인들이 나눈 대로 한다면 인간의 존엄이란 생물학적 생명을 가진 존재로서의 존엄을 넘어 사회적 생명을 가진 존재로서의 존엄을 의미한다.
사회적 생명을 가진 존재로서의 존엄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다른 이의 삶을 내 삶의 동반자로 여긴다는 의미에서다. 그렇기에 그의 존엄을 존중한다는 것은 그를 삶의 동반자로서, 공동세계의 일원으로서 존중한다는 의미이다. 그렇기에 그의 존엄성을 존중한다는 것은 나와 함께 공동세계를 짓고 있는 그의 활동, 그의 의견을 존중한다는 말이 된다. 그의 말을 묵살하고, 그를 파괴하는 것이야 말로 그의 ‘사이로 살아가는 존재’라는 의미에서의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 파괴 행위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도달하는 결론은 이러하다. 그의 존엄성을 지켜준다는 말은 공동세계에 참여하는 그의 활동과 의견을 존중한다는 말이 된다. 존엄에 입각한 안전이란 공동세계에 참여하는 그의 활동과 의견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의미에 다름 아니다. 활동과 의견이 안전한 사회, 그 사회가 바로 인간의 존엄성이 보장받는 사회다. 그렇지 않고 그저 생물학적 생명이나 ‘보호’하는 사회에는 존엄성은 없다. 그런 사회에서 우리는 그저 목숨이나 구걸하고 사는 비루한 존재일 뿐이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백남기 농민의 죽음을 바라봐야 한다. 혹자들은 그가 시위에 참여했기 때문에, 그것도 ‘불법’ 시위에 참여했기 때문에 죽음을 당한 것 아니냐고 말한다. 즉 그의 행위 자체가 그에게 위해를 가한 것이고, 안전을 저버린 것은 그 자신이기에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것이다. 안전하고자 하였으면 시위에 참여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것이며, 스스로 자초한 일이니 자기가 책임을 져야한다는 말이 된다.
여기서 우리는 저들이 이야기하는 안전이 무엇인지를 비로소 알 수 있다. 저들이 말하는 안전이란 바로 생물학적 생명에 대한 안전이다. 그 안전을 위해 ‘말하는 존재’로서, ‘사이로서만 존재할 수 있는 존재로서의 존엄’을 버리라는 말이 된다. 그 결과 나오는 국가의 명령이 이것이다. 안전하고 싶으면 가만히 있으라. 가만히 있지 않으면 위험하며, 그 위험은 가만히 있지 않은 당신이 자초한 것이다. 이를 통해 그들은 안전과 존엄을 대치되는 것으로 만들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존엄 없는 생명, 비루한 삶이냐 죽음이냐는 선택을 강요하는 것이다.
그러나 존엄의 관점에서 이것은 삶과 죽음의 선택이 아니다. 이것은 죽음과 죽음의 선택이다. 이미 미국의 도망노예였던 프레드릭 더글러스가 간파한 것처럼 말할 수 없고, 공동세계에 참여할 수 없었던 노예는 1) 주인 밑에서의 비루한 노예의 ‘삶’과 2) 도망을 가다 총에 맞는 ‘죽음’ 사이의 선택이 아니라1) 주인 밑에서 비루하게 살다 주인의 변덕에 의해 채찍에 의해 맞아 죽는 ‘죽음’ 과 2) 삶을 위해 도망치다 총에 맞는 ‘죽음’ 두 죽음 사이의 선택만이 있을 뿐이다. 그는 ‘비루할지언정 삶은 그래도 삶이 아니냐’는 말이 사실은 ‘죽음’이라는 걸 간파했다.
저들이 말하는 비루한 삶이라는 안전 역시 마찬가지다. 그 안전은 안전이 아니라 잠시 유예된, 그러나 언제 도래할지 모르는 죽음이다. 공동세계에 참여하는 의견과 활동이 없다고 해도 비루할지언정 삶은 보장되리란 기대를 배신한 것이 바로, 메르스요, 강남역이요, 구의역이다. 가만히 있는다고 살 수 있는 게 아니라 가만히 앉아서 죽을 뿐이다. 그렇기에 이것은 삶과 죽음 사이의 선택이 아닌 죽음과 죽음 사이의 선택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요구해야하는 것은 존엄과 안전이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안전하기 위해 가만히 있는 삶이 아니라 활동과 의견이 안전한 사회를 요구해야 한다. 안전하기 위해 시위를 피해 다니는 삶이 아니라 거리에 나와 시위를 하는 게 안전해야 한다. 그런 시위 자체가 우리 삶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는 국가의 무능과 무관심, 그리고 무모함을 막기 위한 것이면 더욱 그렇다. 이런 활동이 안전하지 못할 때, 국가는 더욱 무관심해지고 무능하며, 무모해지기 때문이다. 이 위험을 막기 위한 활동이 안전하지 못할 때 국가는 흉기가 되고 삶은 파괴된다.
우리는 안전이 마치 침묵의 대가인 것처럼 말하는 권력에 맞서야 한다. 대신, 말하는 것이 안전한 사회를 요구해야 한다. 우리는 결국 안전은 각자가 알아서 해야 하는 것이라는 말에 맞서야 한다. 우리가 요구해야하는 것은 '사회'이지 안전을 지켜내는 각자의 '능력'이 아니기 때문이다. 안전한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존엄을 요구하는 활동이 안전한 사회가 안전한 사회다. 존엄과 맞바꾼 안전이 아니라 존엄한 안전을 요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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