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폭력에 맞선 강정마을 사람들
오늘도 강정마을엔 싸이렌이 울리고 있다. 긴급한 음성이 마을스피커를 통해 다급하게 전해진다. “지금 긴급한 상황이 발생했으니 마을 주민들은 하던 일손을 멈추고 해군기지 공사장 정문으로 나와 주십시오.”하고 여러 번 호소한다. 또 제주해군기지 공사장 정문에서 마을 주민들과 경찰이 대치중이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8명이 연행됐다. 강정주민들의 목청에는 분노와 억울함이 함께 터져 나온다. 강정마을에 싸이랜이 하루가 멀다 하고 울린다. 사실 이런 일이 강정마을 주민에겐 일상이 됐다. 올레 제7코스를 찾은 올레꾼들은 의아해 한다. 그것도 그러할 것이 그 어느 마을에서도 경험하지 못했으리라. 마치 민방위 훈련하는 것처럼 마을주민들은 싸이렌이 울리면 방송 소리에 집중해서 듣고, 그에 맞는 행동들을 하기 때문이다.
강정마을 주민들은 누굴 대항해서 이렇게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일까? 아시겠지만 그것은 국가 권력에 맞서는 것이다. 국가가 부당하게 일방적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폭력적이면서 불법적인 방법으로 해군기지 공사를 강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주엔 4.3의 아픔이 아직도 남아있다. 1948년 4월3일 제주의 민중들은 남과 북의 분단이라는 비극을 바라보며 일어서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얻은 독립인데, 이제 한반도 갈라놓는 상황에 이르러 민중들이 분노하며 일어났다. 아마 분노하지 않은 민중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제주도민의 분노는 가장 처참한 대가를 치렀다. 제주 4.3 항쟁으로 약 3만 명의 민중이 학살을 당했고 지금도 행방을 알 수가 민중들이 있다. 이러한 자행은 그 누구도 아이라,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국가권력에 의해 벌어진 것이다. 여기에는 이념도 없었다. 국가권력은 제주의 힘없는 민중을 ‘좌파’, ‘빨갱이’ ‘폭도’라 낙인찍고 총칼로 진압했다.
제주해군기지의 건설을 둘러싼 논쟁은 제주지역에서 20여년 가까이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대표적인 갈등문제이다. 2010년 12월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해군기지 건설과정에서 다수의 연행자가 발생하고 있고, 물리적 충돌이 계속되면서 이런 불상사에 대하여 많은 우려가 있다. 특히 정부가 수도권 지역 경찰 투입으로 강정마을은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국가권력으로 마을 주요 도로를 통제하고 있는 상황이다. 때문에 제주지역 주민들은 강정마을문제를 제주4.3을 연상하며 분노하는 이들도 있다.
강정마을은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 권리를 빼앗겨다.
강정마을엔 200여 개의 계모임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계모임은커녕 초등학교 동창회마저 찬·반 회원으로 나눠져 모임이 없어지거나 절반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사랑이 넘쳐나던 교회도 해군기지문제로 나눠져 예배드리고 있는 실정이다. 제주에는 전통적으로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 의식이 강한 생활역사를 가지고 있다. 마을에 힘든 일이 있으면 다같이 품으로 밭농사나 대소사 까지,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거뜬히 이겨내곤 했다. 제주에서는 모두가 조카이고 삼촌이다. 따라서 마을 전체가 한 가족처럼 지낼 수 있었고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 이런 행복마저도 빼앗아 강정마을 주민에겐 웃음을 찾아볼 수 없다. 그 행복을 빼앗은 당사자는 국가권력임을 잘 알고 있다.
주민들 스스로의 결정을 왜 못 받아들이나?
2007년 해군기지 최종 후보지로 결정될 당시 서귀포시 강정마을은 해군기지 건설사업 후보지로 거론된 적이 없던 지역이었다. 그러나 해군의 지역유지와 일부 어촌계원을 회유와 묘략에 의해 4월 말에 기습적으로 마을 회장을 비롯한 몇몇 주민들의 주도에 의해 유치신청이 이뤄졌다. 이와 같은 갑작스런 과정은 그 해 6월 마을 주민들의 증언에 의해 해군과 제주도 당국의 사전 개입 등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 밝혀지기도 하였다. 이후 2007년 8월 20일 전체 주민투표를 통해 만19세 이상 주민 725명이 투표에 참가해 반대 680명-찬성 36명-무효 9표로 반대입장을 결정하였다. 이 과정에서도 공권력이 찬성주민을 사주하여 투표함을 탈취하는 등의 주민투표 방해 행위를 자행하는 행태를 보이기도 하였다.
당신들은 공권력이라 말할 수 없다.
제주 해군기지 공사장 정문 앞에서 기도를 드렸다는 이유로 천주교 수녀님들과 신부님들을 그리고 같이 있던 청소년들을 포함 29명을 업무방해의 혐의로 강제연행한 일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수도자들을 강제로 연행한 일은 그 사례를 찾아보기 극히 힘든 사태이다. 어떻게 보면 강정마을에서는 극히 드문 사례가 많다. 지금까지 경찰에 연행된 숫자만도 어림잡아 200명은 족히 넘을 듯하다. 이는 누가 보아도 경찰의 유도되거나 계획된 연행임에는 틀림없다. 이에 따른 결과는 벌금폭탄이다. 국가권력은 벌금으로 압박하고 위협했지만 끝내 꺽이지 않았다.
공권력이라는 이름으로 회유와 협박은 토지 강제수용당시에도 있었다. 50여명의 토지주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토지보상비 공탁금을 빨리 받아가지 않을 경우 국가사업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강제수용 토지에 있는 시설물에 대한 과징금을 최대로 부과하겠다는 것이다. 결국 마을 어르신들은 울며겨자먹기식으로 토지를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얼마 전 검찰에서 날아온 공소장을 보고 웃음이 나왔다. 검찰의 공소장에서 해군기지반대단체들은 벌금으로 처벌하는 것은 약발이 먹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이유가 해군기지 저지투쟁에 사용하는 장비들을 구입과 8,000만원에 이르는 보석금을 일시에 납부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재판부는 이들 모두에 실형을 선고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지난 2월2일 양윤모 감독의 영장실질심사에서도 이례적으로 수사검사가 직접 재판부에 나와 “관대함의 한계를 넘어섰다.” 등의 발언을 하는 작태를 보이기까지 했다. 결국 양윤모 감독은 구속됐다.
우리는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른바 관계기관 연석회의라는 이름으로 경찰, 검찰, 국정원, 해군, 제주도의 고위직들이 모여서 어떻게 하면 강정마을 주민들과 해군기지 반대하는 제주도민들을 때려잡아야 하는지를 논의했던 사실을 말이다.
생명 평화의 마을로
강정마을은 지난 5년 동안 제주해군기지 건설에 대항하여 주민들의 권리를 강탈하면서 까지 폭력과 불법, 탈법적으로 진행되어 국가폭력에 맞서 싸워왔다. 제주해군기지 반대투쟁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을까 우려하는 이들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정해군기지문제는 전국과 전 세계적으로 알려져서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연대해 주고 있다. 이 연대의 힘으로 제주해군기지를 전면 백지화 하고 아시아 평화의 중추로 기능 할 수 있는 생명 평화의 섬으로 이끌어 갈 강정마을 공동체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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